book_archive_아무도 아닌
22 Aug 2020 Archive아무도 아닌
- author : 황정은
上行
시골에서 살면 좀 나을까 싶어서 알아보러 내려온 거거든. 나, 도시에서 사는 건 이제 싫다. 육 개월 단위로 계약서 써가며 일해봤냐. 사람을 말린다. 옴짝달싹 못하겠어. 마땅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직장에서 한마디 할 수 있기를 하나. 눈치만 보게 되고 보람도 없다. 계약서 갱신할 날이 다가오면 가슴만 이렇게 뛴다. 다 때려치우고 이런 곳에서 한적하게 살아볼까 싶었는데 만만치 않네. 시골에서도 뭐가 있어야 산다잖냐. 내가 참, 뭐가 없는 놈이구나, 이런 생각만들고, 괜히 왔다. -27p-
노부인이 내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고 말했다.
자고 가.
밥 줄게.
누군가 도와줬으면 해서 둘러보았지만 오제도 오제의 어머니도 짐을 확인하느라고 바빴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서 있다가 다음에 와서 자고 갈게요, 라고 말했다. 몇 겹으로 왜곡된 안경 속에서 노부인의 눈이 슬프게 일그러졌다.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테냐.
…..
오긴 뭘오냐 니가, 라고 토라진 듯 중얼거리는 노부인 앞에서 안하느니만 못한 말이자 약속도 안니 약속을 해버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33p-
나는 잠자코 조수석에 앉은 채로 월식을 생각했다. 한 번도 그걸 본 적이 없었다. 보자고 굳게 마음을 먹어도 언제나 잊었다. 이번에야말로, 라고 나는 다짐했으나 막상 그 시간이 되면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나도 알 수 없었다. -35p-
양의 미래
호재의 곁에서 나는 몇 번인가 내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묵묵히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 남성성이 완전히 사라진 듯한 모습으로, 아버지라기보다는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집안 살림을 하는 왜소한 체구의 아버지.
어머니가이제 죽었으면 좋겠어.
아버지도.
이런 이야기를 내가 했을가. 내가 정말로 했을까. 둘 가운데 어느 이야기를 했고 어느 것을 하지 않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둘 다를 하지는 않았어도 둘 가운데 하나는 했을 것이다. 평생 아이를 만들지 않을 거라고 내가 말했을 때 호재는 왜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46p-
화단엔 늘 고양이가 몇 마리 있었다. 고양이들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는 하며 밥을 먹고 갔다. 화단에서 밥을 먹고 자란 암컷들은 새끼를 배면 화단으로 돌아왔다. 어미 고양이와 새끼들. 그들이 바꿔가며 어디론가 갔다가 돌아오곤 하는 동안 호재의 우산은 그대로 관목 위에 펼쳐져 있었다. 낡은 우산살 위로 우산 천이 말려 올라간 모습으로 말이다. -48p-
…마침내 중간 선반에서 바짝 마른 걸레로 덮인 망치를 찾아냈다. 그걸 쥐고 그 벽 앞에 섰다. 습기와 곰팡이가 덩굴무늬처럼 번진 벽 귀퉁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도 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졌다. 그가 모를 뿐 터널은 있다. 봐. 바람이 분다. 터널을 관통하는 바람이 이렇게. 나는 그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망치를 들어서 몇 번 휘두르면 가능했다. 어쩌면 계란 껍데기를 뚫는 것처럼 쉬울 수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문에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터널이 있는 것과 터널이 없는 것.
…
나는 그걸 알 수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냥 망치를 쥔 채로 벽 앞에 서 있다가 내 도시락이 놓인 박스 곁으로 돌아갔다.
-58p-
가난하고 돌보아줄 인연 없는 늙은 자로서 병들어 죽어가는 것처럼 비참한 일이 있을, 생각한다. 저자는 이런 죽음을 두고 여태껏 인류가 발명한 어느 무기도 그런 형태의 자연사만큼 사람을 강력하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늙어 죽는 것을 소망한 것이 아니고 길 가다 우연하게, 느닷없이 죽고 싶다고 써두었다. 나는 그의 문장 곁에 그렇다, 라고 적은 뒤 연필 끝으로 종이를 꾹꾹 누르고 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60p-
상류엔 맹금류
그러나 어느 엉뚱한 순간, 예컨대 텔레비전을 보다가 어떤 장면에서 그가 웃고 내가 웃지 않을 때, 그가 모는 차의 조수석에앉서 부쩍부쩍 다가오는 도로를 바라볼 때, 어째서 이 사람인가를 골똘히 생각한다.
어쩌서 제희가 아닌가.
그럴 땐 버려졌다는 생각에 외로워진다. 제희와 제희네. 무뚝뚝해보이고 다소간 지쳤지만, 상냥한 사람들에게.
명실
그녀에게는 갓난아기의 도톰한 발을 쥐고 엄지로 발바닥을 문지르며 감탄한 기억이 있었다. 굳은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랑한 살에 관한 기억이었다. 직립과 보행을 아직 경험하지 않은 인간의 발. 누구나 이런 발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일단 일어서서 걸음을 걸음을 배우게 되면 달라지지. 완전히 다른 조직인 것처럼 발바닥도 뒤꿈치도 딱딱해져… 그게 너무 서글프다고 생각하며 그 작은 발을 한참 만닌 기억이 있었다. -95p-
그녀가 가진 것은 파편들이었다. 문장이라기보다는 목소리였고 모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흩어지는 메아리들이었다. 실리의 이야기들은 책이 되지 못했다. -99p-
실리는 늘 다루곤 하는 사물에 특별한 애착을 품었고 종종 그런 사물들에 정서가 있다고 우겼다. …. 혹시나 그런 장소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기면 낯선 곳에서 그 물건이 무엇을 느낄지, 그래 정말 무엇을 느낄지, 그 조그만 사물이 난데없이 그 자리에 홀로 남아 얼마나 애가 타고 허탈할지, 그런 것을 다 속상해하고는 했다. 본인이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실리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으므로 무언가를 혼자 남겨두는 것에 예민한게 반응했다. -103p-
그건 꼭 …. 죽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같다고 그녀가 말하자 실리는 그런가, 라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이 죽은 사람을 기다리는 이야기. 실리는 그걸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를 언제 까지고 벌판에 내버려둔 채로 죽고 말았다. 실리의 화자는 내내 벌판에 있는 것이다. 마리코가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갈까봐 앉지도 못하고 서서. -105p-
그게 필요했다.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이때.
어둠을 수평선으로 나누는 불빛 같은 것. 저기 그게 있다는 지표 같은 것이.
그 아름다운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노트에 만년필을 대고 잉크가 흐르기를 기다렸다. 제목을 적고 쉼표를 그리고 이름을 적었다.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111p-
누가
노인이 오 년 동안 머물렀던 방은 벽지도 바닥재도 그대로였다. 바싹 마른 벽에 둥글게 자국이 남아 있었고 그녀는 바로 그 자리에 노인이 머리를 대고 앉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노랗다못해 붉은색을 띤 기름 얼룩. 거기에 머리를 대고 노인은 도대체 뭘 보았을까.
…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정당하게 세를 내고 이 집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노인을 내쫓았다가는 기분이 든다….. 여기서 나가서 노인은 아마 더 좋지 않은 곳으로 갔을 것이다… 잘 모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었지만 다른 어떤 가능성보다도 그것이 그녀에게는 더 리얼하게 여겨졌으므로 그게 유일한 가능성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내 탓인가. 내가 내쫓았나. 그녀는 이불을 발로 차며 돌아누웠다. 노인은 방을 유지할 능력이 없엇을뿐이고 내게는 있었을 뿐. 그냥 그것뿐. 만사가 그뿐.
-127p-
그제는 건너 자리의 상담원이었던 선배의 계약이 해지되었다.
정말로 진심으로 곤란하고 미안하고 당신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처럼 말했지. 안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안 그러니까. 안 그러니까 안그랬더라면 좋았을 건데. 그는 그러지 않았지 . 재수없는 새끼 … 고객 같은 놈… 선배가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을 때 그녀는 그 선배의 자리에서 자기 자리까지 남은 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강 없었고 안됐다고 생각했다. 안됐다….거기까지. 그 너머는 벼랑이니까.
누구도 가본적 없는
안장은 어디에 있을까. 세상이 아이에게서 통째로 들어낸 것, 멋대로 떼어내 자취 없이 감춰버린 것. 이제 시작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지… 이렇게 시작되어서 앞으로도 이 아이는 지독한 일들을 겪게 되겠지.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거듭 상처를 받아가며 차츰 무심하고 침착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
그 밖에 내가 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 거 챙기라고 … 가방에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 잊지 말라고 .. 그냥 그거 하나 … 당신은 괜찮지 걱정이 없지 내가 다 하니까… 당신은 잘 먹고 잘 자고…어디서든 …호텔에서든 비행기에서든…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비위가 좋냐 그렇게 멀쩡하게 괜찮을 거라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 모든게…
그는 문득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글픈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울화가 치밀어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렇게 보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마. 사람 빤히 관찰하지 마. 너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내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웃는 남자
나는 이해한다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이해한다는 말은 복잡한 맥락을 무시한 채 편리하고도 단순하게 그것을, 혹은 너를 바라보고 있다는 무신경한 자백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가가하고 있었다. 나 역시 남들처럼 습관적으로 아니면 다른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 그 말을 할 때가 있었고 그러고 나면 낭패해 고개를 숙이곤 했다.
그런데 그 밤에 그가 내 등을 두드리며 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놀랐고 그 말에 고리를 걸듯 매달렸다. 이 사람이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저날의 나를 내가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을 할 수 있으려면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내가 이제 무엇이 되는 게 좋을까.
단순해 지자.
가급적 단순 한 것이 되자고 나는 생각했다.
-165p-
디디는 부드러웠지 . 껴안고 있으면 한없이 부드러워서 나도 모르게 있는 힘껏 안아버릴 때도 있었어. 이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 행복으로 나 역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1p-
디디는 제때 나를 발견하려고 내가 도착할 무렵엔 자주 고개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한 줄을 읽고 고개를 들어 비탈을 바라보고. 더 행복해지자, 담배와 소변 냄새가 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며 나는 다짐하고는 했다. 행복하다. 이것을 더 가지자. 더 행복해지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샏ㅇ각하지 말고 그것 한 가지를 생각하자. 그런 생각을 하며 마지막 계단에 이르면 디디가 햇빛에 빨갛게 익은 얼굴을 하고 마중나와 있었다. -176p-
디디를 먹어치운 거리. 디디의 목을 부러뜨리고 머리를 터뜨린 거리. 거기엔 의미도 희망도 없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기는 다른가.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곳, 여기 무엇이 있나. 벌거벗은 벽이 있고 내가 있고 의자가 있고 내 잡동사니가 있다. …..
내가 여기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나가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그것을 생각해왔다. -185p-
복경
다시는 그렇게, 그 남자와 그의 누나처럼 초췌하게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 살려내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진통조차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마음은 뭐가 되겠습니까. 짐슴 아니겠습니까. 짐승이 되어버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 그 짐승이 되지 않으려고 돈을 법니다. -194p-
도게자.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게자라고 해. 사람들은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것은 그 자체야. 이 자세가 보여주는 그 자체.
매장에서 난리치는 사람들은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 으로 충분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 어디나 그래 자기야. 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
-201p-